서정후
저널 목록

코스피 기록의 벽 — 삘로 시작해 정직함으로 끝낸 프로젝트

#코스피기록벽#사이드프로젝트#디자인엔지니어링

시작은 충동이었다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요즘 코스피가 이상하게 출렁였다. 1월에 5,000을 처음 넘더니 2월엔 6,000, 5월엔 7,000을 단숨에 뚫고 일주일 만에 8,000까지 갔다. 1980년 1월 4일, 100에서 출발한 지수가 말이다.

숫자만 보면 비현실적인데, 그 비현실이 매일 종가로 찍히고 있었다. 그 흐름에 꽂혀서 주말에 만들기 시작했다. 그게 다였다.

차트가 아니라 벽이었다

처음 떠올린 건 '그래프'가 아니라 '벽'이었다.

어두운 미술관 전시실, 작품 위에만 떨어지는 좁은 조명. 코스피 45년을 길게 한 폭으로 벽에 걸고, 시선이 닿는 자리에만 빛이 떨어져 그날의 사건과 숫자가 떠오르게 하고 싶었다.

명조체를 쓴다고 한국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건마다 그림에 찍는 붉은 도장처럼 표식을 두고, 한국 전통의 다섯 색을 미술관처럼 아껴 쓰고, 지수 곡선은 먹으로 한 번 그은 듯한 선으로 그렸다. 타이틀 뒤 태극기는 평소엔 거의 안 보이다가, 커서가 만든 빛 아래에서만 잠깐 드러난다.

한국적인 건 장식이 아니라 빛을 다루는 방식이라고 봤다.

가장 오래 붙든 건 정직함이었다

디자인도 인터랙션도 아니었다. 데이터가 정직한가였다.

처음엔 2026년 구간을 그럴듯한 추정치로 채웠다. 보기엔 좋았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싫었다. 코스피 종가는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지어낸 숫자로 채운 벽은, 아무리 예뻐도 거짓말하는 기록물이다.

손으로 적어 넣은 미래 숫자를 전부 들어냈다. 대신 실제 데이터를 한국 증시 마감 시각에 맞춰 자동으로 가져오고, 5,000·6,000·7,000·8,000 돌파나 흐름이 크게 꺾이는 지점은 사람이 찍는 게 아니라 실제 종가에서 자동으로 잡히게 했다. 데이터를 못 가져오면 검증된 과거에서 정직하게 끊고 멈춘다. 가짜로 늘리지 않는다.

예쁜 거짓말보다, 정직한 공백. 이 프로젝트에서 내가 가장 분명히 정한 원칙이었다.

AI와 함께 만들었다

이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AI와 함께했다.

평소엔 화면을 그리는 게 내 일이었다면, 이번엔 그 화면이 진짜로 작동하게 만드는 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방향을 던지면 코드로 받아 오고, 다시 다듬는 식으로.

흥미로운 건, AI가 가장 잘한 게 '구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가 편하자고 가짜 숫자를 다시 넣자고 했을 때, 그건 앞에서 정한 정직함 원칙과 어긋난다고 짚어 준 쪽이 오히려 작업 상대였다. 도구가 판단을 대신하진 않지만, 좋은 도구는 내가 세운 기준을 잊지 않게 해 줬다.

만들면서 배운 것들

예상은 자주 빗나갔다. 쉬울 줄 알았던 게 며칠을 잡아먹고, 어렵겠다 싶던 게 금방 풀리기도 했다.

100에서 8,000까지를 한 축에 그냥 욱여넣으면 초반 20년이 바닥에 깔려 보이지 않는다. 눈금을 값이 아니라 비율로 읽는 방식(로그 스케일)으로 바꾸고 나서야 위기와 회복의 폭이 제대로 보였다. 직접 해봐야 아는 것들이었다.

화면을 고치면 브라우저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넘기고 기다리던 시간이 사라진 건, 디자이너에게 생각보다 큰 차이였다.

앞으로

기록벽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오늘의 종가가 같은 곡선 위에 계속 이어지고, 새 돌파가 나오면 표식이 자동으로 붙는다. 한국어와 영어를 지원하고, 데스크톱에서 가장 잘 보이지만 모바일에서도 스크롤에 맞춰 결이 움직이게 다듬었다.

데이터는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된다. 단, 그게 진짜일 때만.

kospi.hey-hu.com →